옛 관직 이야기

옛날 관직에 대해 설명합니다.

  • 2025. 4. 19.

    by. ⅲ⋰∵∧≋

    목차

      조선시대 정치는 혈연으로 얽힌 권력 구조 속에서 움직였다. 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는 문신, 무신, 당파만이 아니라, 왕의 가족들, 특히 왕족인 종친과 왕비의 친정 집안인 외척의 개입 여부에 따라 정국의 흐름이 크게 달라졌다. 종친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품계를 부여받으며 왕족으로서의 상징적 위상을 누렸고, 외척은 혼인을 통해 왕실과 연결되며 실질적인 정치 권력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맡은 관직은 제도적으로 제한되기도 하고, 시대의 분위기에 따라 크게 변화하기도 했다. 이번 글에서는 조선시대 종친과 외척의 관직 참여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정리하며,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권력과 관직에 접근한 두 집단의 차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1. 종친의 명예직 관직: 품계는 높고 직무는 제한적이었다

      조선시대 종친은 왕의 직계 혈족, 즉 왕의 형제나 자손, 사촌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대부분 정1품 또는 종1품 품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맡는 관직은 실질적 국정 운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로 종친에게 주어진 관직은 종친부 도제조, 종묘 제사 대행, 경연 참여자, 국왕의 교육 조력자 등이었다. 이들은 외국 사신 접대 같은 의례적 임무에 자주 동원되었고, 왕권을 대리하거나 상징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로는 태종의 아들 양녕대군이 국정에서 배제된 뒤에도 왕실 행사에 참여하며 ‘왕족의 대표’ 역할을 수행한 사례가 있다. 이는 조선이 왕권과 가까운 종친의 정치 개입을 철저히 제한하면서도, 그들의 사회적 위상은 제도적으로 보장한 결과다. 요약하자면, 종친은 높은 품계와 작호를 부여받고 왕실의 품격을 상징하는 존재로 남았지만, 행정적 실권을 가진 ‘실무 관료’로서의 활동은 대부분 배제되었다.

      2. 외척의 권력 참여: 왕비 친정의 정계 진출과 영향력

      반면 외척은 조선 정치에서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다. 외척이란 국왕의 왕비나 대비의 친정 가족을 뜻하며, 장인이나 처남, 외삼촌 등이 해당한다. 이들은 처음에는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지만, 점차 왕권과 왕비의 권위에 기대어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중종 이후로 외척의 정치 개입은 빈번해졌고, 대표적으로 문정왕후의 오라비 윤원형은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좌의정에 오르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외척은 병조판서, 이조판서, 형조판서 등 국가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행정권뿐만 아니라 인사권까지 장악했다. 외척이 실권을 쥘 경우에는 대규모 인사 교체가 일어나거나 특정 가문이 조정의 대부분을 독점하는 사례도 있었다. 이처럼 외척은 왕권이 약해지거나 왕이 미성년일 때 국정을 대리하는 중요한 위치에 서기도 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세도정치의 핵심 주체가 되면서 국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한 권력 집단으로 변모했다.

      3. 종친과 외척의 관직 구조 비교: 역할과 접근 방식의 차이

      종친과 외척 모두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지만, 이들이 맡았던 관직의 유형과 그 역할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종친은 대부분 상징적이고 의례 중심의 관직을 맡으며 국가 운영보다는 왕실의 품격을 드러내는 존재로 기능했다. 반면 외척은 실제 국정을 좌우할 수 있는 실무 관직, 특히 이조·병조·형조 같은 핵심 육조의 수장직을 맡으며 조정의 흐름을 주도했다. 특히 외척은 국왕의 즉위 직후 인사권을 선점하거나, 대신 임명에 개입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했다. 이에 반해 종친은 대부분 조정 중심보다는 지방 의전이나 왕실 행사에 국한된 역할을 맡았다.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관직 기록을 보면, 외척 출신의 인물은 정2품 이상의 고위직에 수차례 오르는 반면, 종친은 대체로 동일 품계를 유지하거나 실무에서 배제된 명예직에 머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조선이 종친에게는 정통성과 위엄을, 외척에게는 실무와 정치를 나눠 맡긴 정치적 타협의 결과이자, 권력 분산을 위한 구조적 장치이기도 했다.

       

      종친과 외척의 직무

      4. 시대에 따라 달라진 권력의 무게: 종친과 외척의 변화상

      조선 초기에는 왕권이 강했기 때문에 종친과 외척 모두 정치적 역할이 제한되었으나, 국왕의 권위가 약해지거나 어린 군주가 즉위한 시기에는 외척과 종친이 정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종 시기의 흥선대원군은 국왕의 아버지이자 종친으로서 실질적으로 국가를 통치한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왕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 종친은 대부분 정치적 안정의 상징으로 존재했고, 그 권위는 줄곧 유지되었으나 실질적인 행정 참여는 제한되었다. 반면 외척은 왕권을 보좌하거나 대체하는 실질 권력자로 등장했고, 특히 순조 이후 세도정치기에는 외척 가문이 조정을 독점하며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결과적으로 종친은 조선 왕조의 품격과 유교적 권위의 상징이 되었고, 외척은 정치 실무와 권력 운영의 핵심 축으로 작용했다. 이처럼 두 집단의 정치적 기능과 위치는 시대와 국왕의 정치 스타일에 따라 달라졌으며, 조선 정치사에서 중요한 균형 추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