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관직 이야기

옛날 관직에 대해 설명합니다.

  • 2025. 4. 14.

    by. ⅲ⋰∵∧≋

    목차

      ‘공무원’이라는 직업이 오늘날 안정성과 체계적인 생활의 상징으로 여겨지듯,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의 사람들에게도 ‘관직’은 매우 중요한 삶의 기반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관직을 그저 "높은 자리에 앉은 양반"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고위직이 아닌 일반 실무 관료들의 시선에서, 옛날 사람들의 ‘직장생활’을 들여다보려 한다. 아침 출근부터 상사의 눈치 보기, 승진 경쟁, 회식 문화까지. 생각보다 지금과 닮아 있는 옛날 직업 세계를 관직 중심으로 살펴보자.

       

      관직으로 본 과거 직업

      1. 아침 조회부터 당번까지, 일상의 시작

      조선시대 문관들의 하루는 예나 지금이나 ‘아침 회의’로 시작되었다. 대체로 오전 5~6시에 궁궐이나 각 부서 앞에 집결해 근무 준비를 마쳤다. 이른 시간부터 출근하는 이유는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왕이 이른 시간에 정무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특히 승정원, 이조, 병조 등 핵심 부서의 관원들은 일찍 도착해 문서를 정리하고 보고 순서를 정했다.

      이른바 ‘초조(初朝)’라 불리는 아침 업무 보고 시간은 지금의 팀 회의와 유사했다. 부서별 실무 담당자인 정랑과 좌랑, 낭청들은 하루 업무 보고서를 정리하고, 판서나 참판의 결재를 받기 위한 문서들을 준비했다. 보고 순서에서 밀리는 경우는 결국 하루 종일 대기하다 허탕을 치는 일도 흔했으며, 상관이 부재중이거나 왕의 의중이 바뀌는 경우 다시 결재서를 뜯어고쳐야 했다.

      한편, 문서 보관이나 청소, 궁궐 외곽 파견 등은 부서별 당번제를 통해 돌아가며 수행되었으며, 병조나 형조 같은 부서는 사건 발생 시 야근까지 했다는 기록도 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당직근무나 주말 비상대기조 같은 개념으로, ‘공무원이 편하다’는 인식은 옛날에도 편견에 불과했다.

      2. 승진을 위한 과제와 정성 평가

      오늘날 조직 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성과 평가’와 ‘승진’이듯, 옛날 관직 생활에서도 철저한 승진 제도가 존재했다. 특히 조선은 과거급제 이후에도 성실한 업무와 상사의 신뢰가 승진의 열쇠였다. 정기적인 평가 기록인 ‘고과’는 상관이 직접 작성했으며, 내용에는 문서 정리 능력, 대인관계, 충성도, 정시 출근율까지 포함되었다.

      이러한 평가 방식은 오늘날의 인사 고과제도와 거의 유사했다. 예컨대, "정랑 김 아무개는 매사에 신중하고, 문장력이 우수하나 보고서 처리 속도가 느림"과 같은 평가는 인사권자의 판단 근거가 되었다. 이 결과에 따라 같은 과거급제자라도 누구는 참의로, 누구는 낭청으로 남게 되었다.

      또한 각 부서 간에는 ‘비공식 경쟁’이 존재했다. 특히 이조는 인사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내부에서의 서열 싸움과 타 부서 간 신경전이 치열했다. 오늘날 HR부서가 조직 내에서 주요 파워를 가지는 이유와 일맥상통한다. 업무 효율뿐만 아니라 상관의 신임을 얻는 ‘정무 스타일’도 평가에 중요한 요소였으며, 커피 대신 차를 자주 올리는 세심한 배려도 고과에 반영되곤 했다.

      3. 회식, 인맥, 그리고 음서의 세계

      직장생활에서 회식 문화나 사적인 관계가 중요한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조선시대에도 명절, 승진 축하, 왕의 하사품 수령일 등을 계기로 부서 단위의 ‘모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는 시를 짓거나 글을 낭독하는 문화적 회식이 일반적이었으며, 술과 안주는 관청 내 부엌에서 마련하기도 했다.

      관직 간의 인맥도 직장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고을 출신, 같은 과거 급제 동기, 같은 스승에게 배운 인연은 오늘날의 학연·지연 못지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특히 문과 1등 합격자인 장원 급제자는 궁중 행사 초대, 왕의 특별 하사품 등 부가 혜택을 통해 빠르게 승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에 고려시대부터 이어져 온 ‘음서제’는 고위 관료 자제에게 시험 없이 관직을 주는 제도로, 현대식으로 해석하면 공무원 세습제에 가깝다. 물론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제도가 강화되며 실력 중심 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여전히 인맥과 배경은 중요한 승진 요인이었다. 이 모든 것은 과거의 직장문화 속에서도 ‘사람 관계’가 업무만큼 중요했음을 보여준다.

      4. 퇴근 후의 삶과 은퇴 제도, 그리고 퇴직금?

      관직 생활도 끝은 존재했다. 일정 연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퇴직하거나 왕의 명으로 물러나는 ‘致仕(치사)’라는 제도가 있었다. 대체로 60세 이상이 되면 자의로 퇴직을 요청할 수 있었고, 왕은 감사의 뜻으로 옷이나 곡식을 하사했다. 이는 오늘날의 퇴직금 개념에 가까우며, 치사 후에도 자문 역할을 하거나 고문 관직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

      퇴근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달라졌지만 대체로 오후 3~4시 무렵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해가 지기 전에는 퇴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다만 왕의 호출이나 급변 사태가 발생하면 늦게까지 남아야 했으며, 야근은 예외적으로 허용되었다. 퇴근 후에는 집안 서재에서 서책을 읽거나, 자녀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자기 계발’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일부 관직은 퇴직 후에도 ‘명예직’으로 남아 지방에 파견되거나 교육 기관에서 강사로 일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공무원 퇴직 후 공공기관 취업에 해당한다. 이는 당시에도 관료의 지식과 경륜을 사회적으로 활용하려는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