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관직 이야기

옛날 관직에 대해 설명합니다.

  • 2025. 4. 13.

    by. ⅲ⋰∵∧≋

    목차

      역사 교과서 속 ‘관직 체계’는 늘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진다. 특히 고려와 조선은 모두 중앙집권적 왕조였지만, 관직의 구성 방식과 통치 이념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 글에서는 고려와 조선의 관직 체계를 나란히 비교하고, 각각의 제도가 어떤 정치적 목적과 행정 효율을 위해 만들어졌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한다. 시대별 차이를 알면 단순한 암기를 넘어서, 관직이 왜 그렇게 조직되었는지 그 배경과 철학까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고려와 조선의 시대정신, 귀족 중심 체제와 유교 관료 중심 체제의 차이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 고려의 문산계·무산계 체계와 이중적 품계 제도

      고려는 관직 제도에 있어서 고유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대표적인 특징은 바로 ‘이중 품계 구조’다. 고려 시대 관리들은 실제로 일하는 ‘관직’ 외에도 ‘산계’라고 불리는 명예 직책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이 산계는 문산계와 무산계로 나뉘었고, 문관은 문산계를, 무관은 무산계를 부여받았다. 산계는 실직을 겸하거나 독립적으로 주어지기도 했으며, 명예직으로서 사회적 위신을 나타내는 기능도 수행했다.

      문산계의 경우 하위 계급부터 시작해 정1품까지 올라갈 수 있었으며, 귀족 사회의 서열을 나타내는 기준이기도 했다. 고위 문벌 귀족들은 높은 산계를 부여받아, 실직이 없더라도 왕실 행사에 참석하거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산계가 높을수록 예우가 달라졌고, 왕과의 거리나 행차 시 자리 배치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려 시대에는 또 하나 중요한 제도가 있었다. 바로 ‘음서제’다. 음서제는 고위 관리나 귀족의 자제에게 시험 없이 관직을 주는 제도로, 혈통 중심의 사회 구조를 유지하는 장치였다. 물론 과거제도도 함께 운영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가문 중심의 인사 운영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당시 정치 구조가 유력 문벌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즉, 고려의 관직 제도는 행정의 효율성보다는 정치적 안정과 귀족 계층의 질서를 유지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는 결국 후기 고려로 갈수록 지방 세력의 자율화, 중앙 권력의 약화로 이어지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2. 조선의 단일 품계 기반 직능 중심 체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적 이상 국가를 지향하며 관직 제도 개편에 착수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명확한 ‘단일 품계 체계’였다. 정1품에서 종9품까지 총 18단계로 나뉜 이 체계는, 관직과 품계가 일대일로 거의 일치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조선은 고려와 달리 실질적인 직무에 초점을 맞추고, 명예직보다는 업무 수행 능력에 따른 등용과 승진을 강조했다.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는 과거제의 절대적 비중이다. 조선에서는 문과·무과·잡과를 통해 공정하게 인재를 선발하고, 그 성과에 따라 관직에 임명하는 체계를 완성했다. 문과 급제자는 대체로 중앙 행정인 육조 또는 홍문관, 승정원 등에서 근무했고, 무과 급제자는 병조나 지방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조선 관직 체계의 또 다른 핵심은 ‘직능 중심’ 구조다. 각 부처는 고유의 역할을 수행하며, 예를 들어 이조는 인사권, 호조는 재정, 형조는 사법을 담당한다. 관직에 따라 실제 권한과 책임이 부여되며, 정치권력은 자연스럽게 각 부처 간에 분산된다. 이러한 구조는 정권 집중을 방지하고 행정력의 전문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또한 조선은 신분보다는 성과 중심의 승진 구조를 추구했다. 정기적인 ‘고과’ 제도를 통해 관리의 근무 성적을 평가했고, 부적격자는 강등되거나 파직되기도 했다. 이는 국가 운영의 효율성과 관료 사회의 긴장감을 동시에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고려·조선 시대의 관직 체계

      3. 고려의 중서문하성과 조선의 육조 체제 비교

      고려와 조선의 중앙 행정 구조를 비교하면, 그 성격과 철학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난다. 고려는 중국 당나라의 행정제도를 본떠 중서문하성, 상서성, 어사대를 핵심 축으로 삼았다. 중서문하성은 정무를 총괄하는 최고 행정기관이었고, 그 수장인 문하시중은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였다. 상서성은 각 부서를 조정하는 기능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형식화되었고, 실권은 중서문하성에 집중되었다.

      육부 역시 존재했지만, 각각의 독립성과 전문성이 떨어졌으며, 정무 결정은 결국 소수의 귀족이나 중서문하성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이는 행정 효율보다는 정치적 타협, 귀족 간 균형 유지에 더 큰 비중을 둔 구조였다.

      조선은 고려의 한계를 보완하여 행정력을 강화한 구조를 선택했다. 육조는 각 부처가 독립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며, 국왕이 의정부를 통해 이를 조율한다. 이는 정치적 합의보다는 행정적 판단과 기능적 전문성을 중시하는 체제다.

      특히 조선은 유교적 군주제를 실현하기 위해 국왕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면서도, 각 부서 간의 견제와 조화를 고려한 분권 구조를 도입했다. 왕이 모든 부처를 통솔하되, 판서와 참판은 독립적인 입법·행정 기능을 가졌고, 경연과 사간원 등 언론 기관은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4. 지방 통치 체계의 조직과 실행 방식 차이

      고려는 5도 양계 체제를 채택했으며, 도 지역에는 안찰사, 양계 지역에는 병마사가 파견되었다. 특히 국경 지역은 중앙에서 직접 통제하며 군사력을 집중했고, 내륙은 비교적 자율적인 운영이 가능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실질적인 지방 통치는 지역 호족이나 토착 세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중앙 명령은 형식적인 경우도 많았다.

      반면, 조선은 중앙의 권위를 지방까지 일관되게 전달하기 위해 8도 체제를 구축했다. 각 도에는 관찰사가 파견되었고, 군과 현에는 수령이 배치되어 사법, 행정, 세무, 군사 등 모든 권한을 행사했다. 이 수령은 중앙에서 정기적으로 평가되었으며, 그 성과에 따라 교체되거나 승진했다.

      조선의 지방행정은 특히 교통과 통신 인프라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운영되었다. 봉수제, 역참, 파발 등 체계적인 통신망을 통해 중앙 명령이 전국으로 신속히 전달되었고, 지방 문제도 빠르게 중앙으로 보고되었다. 이는 고려와 같은 느슨한 구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고밀도 행정 통치였다.

      또한 지방 행정의 정비는 조세 수입의 안정성과도 직결되었다. 조선은 전세, 공납, 군역이라는 세 가지 제도를 통해 지방으로부터 국세를 징수했으며, 수령의 역량이 곧 국가 재정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였다. 따라서 조선은 지방 관리의 도덕성과 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