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관직 이야기

옛날 관직에 대해 설명합니다.

  • 2025. 4. 17.

    by. ⅲ⋰∵∧≋

    목차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하면 바로 출세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과거 시험은 출발선일 뿐, 출세라는 마라톤의 첫걸음일 뿐이었다. 과거에 합격한 인물들은 대부분 정9품이나 종9품의 낮은 관직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철저한 실무 경험과 평가를 거쳐야만 고위직에 이를 수 있었다. 특히 문과, 무과, 잡과 출신에 따라 시작 직책과 출세 속도는 매우 달랐고, 조선 전기와 후기, 중앙과 지방 간에도 큰 차이가 존재했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실제 관직을 얻고, 승진하며, 정승 또는 판서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 제도와 현실, 인물 사례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해설한다.

       

      과거급제 후 직책

      1. 문과 급제 후 첫출발: 직급, 부서, 그리고 초기 코스

      조선시대 문과는 대과와 소과로 나뉘었고, 보통 말하는 과거 급제자는 대과 급제자를 지칭한다. 대과는 3차에 걸쳐 시험이 치러졌으며, 마지막 전시에서의 성적 순위에 따라 출발점이 달라졌다.

      1등은 장원, 2~3등은 방안, 4등 이하가 차석 급제자로 분류되었고, 장원급제자는 곧바로 종5품 이상 관직에 제수되거나 국왕이 선택한 부서로 배치되었다. 대표적 장원 출신 인물로는 성삼문, 이이, 정철 등이 있다.

      일반 급제자는 보통 홍문관 정자, 예문관 봉사,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언 등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종9품이나 정8품에서 출발해, 지방 외직(수령, 군수, 현감) 경험을 의무적으로 거쳐야 승진할 수 있었다.

      실제로 중앙 관직으로만 커리어를 쌓는 인물은 드물었다. 지방에서 백성과 접촉하며 실무 능력을 입증한 뒤, 다시 중앙으로 복귀해 육조의 좌랑이나 정랑으로 승진하는 것이 전형적인 루트였다.

      예를 들어 정약용은 암행어사와 지방 수령 경험 후,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되었고, 김육은 호조좌랑에서 시작해 대동법 개혁을 주도하며 정승 반열까지 올랐다.

      2. 문관 출세의 2가지 루트: 중앙 고시 코스 vs 외직 실무 코스

      문관의 출세 경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 중앙 고시 코스
        홍문관 → 사간원 → 이조 → 형조 → 의정부 → 정승

      이 코스는 성적이 우수하거나 유력 가문 출신이 주로 밟는 코스로, 정치 핵심 부서를 순환하며 실무와 정무를 동시에 익혔다. 홍문관과 예문관은 경연에 참여할 수 있었고, 왕과 직접 소통하며 정치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2. 지방 실무 코스
      군수 → 현령 → 관찰사 → 도승지 → 의정부참찬

      실무형 인물들은 외직에서의 치적을 바탕으로 중앙으로 복귀해 장차관급에 임명되었다. 특히 세종, 정조는 이런 실무형 인재를 선호해 능력 중심 인사를 단행했다.

      단, 유력한 정파의 지원이 없다면 이 코스는 시간이 오래 걸리며, 중도 낙마하는 경우도 많았다.

      3. 무관과 잡과 출신의 출발점과 현실

      무과 급제자의 출발은 대체로 종6품 참군이었다. 참군은 군영 내 실무책임자로, 병력 관리와 훈련, 무기 배치 등의 실무를 맡았다. 중앙 군영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 배치되거나, 지방 수군절도사의 부관으로 파견되었다.

      무관은 무과 급제 후 수십 년간 종5품~정4품에서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다.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에 오르려면 공을 세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반면, 임진왜란, 병자호란 같은 대전쟁을 겪은 후에는 무관의 위상이 급격히 올라갔다. 전공을 세운 인물들은 포상 진급을 통해 종2품~정2품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이순신은 그 대표적 사례다.

      잡과 출신, 예컨대 의과, 율과, 음양과 합격자들은 종9품 봉사, 정8품 참봉으로 시작해 내부 기술직에서 근무했다. 이들은 장기근속을 통해 종4품까지 오르는 경우가 많았으며, 왕실 의료인 경우 정3품까지도 가능했다.

      4. 후기로 갈수록 달라진 출세 구조와 인사 정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관직 승진은 점점 더 정파 중심, 가문 중심, 매관매직 중심으로 바뀌었다.

      17세기 후반 이후 사색당파가 정국을 좌지우지하면서, 과거 성적보다 파벌 소속 여부가 더 중요해졌다. 노론이 정권을 장악하면 노론 출신만 요직에 진출했고, 소론, 남인, 남인은 배제되었다.

      이와 함께 매관매직도 성행했다. 부유한 집안은 일정한 금액을 헌납하고 종5품 이상 관직을 매입할 수 있었으며, ‘공명첩’이라 하여 이름만 올린 가짜 과거 합격증으로 관직에 진출한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이로 인해 출세가 막힌 실력자들이 많았다. 박지원은 문장력과 학문이 뛰어났으나 당색이 약해 고위직에 오르지 못했고, 연암체라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창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같은 학자들도 후계가 막히거나 유배를 겪으며 실질적 출세에서 멀어졌다. 대신 후학을 양성하고, 제도 개혁서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